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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유나이티드 FC(Incheon United Football Club 인천 유나이티드 축구단[*])는 인천광역시를 연고로 하고 있는 K리그2 소속의 대한민국의 프로 축구단으로, 인천광역시의 지자체 및 시민이 중심이 되어 창단한 시민구단이다. 2003년에 팀이 창단해 2004 시즌부터 리그에 참가하고 있다.[1] 홈 경기장은 2012 시즌부터 새로 지은 인천축구전용경기장을 사용하고 있다. 역사 창단 논의와 확정, 리그 데뷔 인천광역시를 연고지로 하는 프로축구단의 창단은 2003년 본격적으로 논의가 구체화되기 시작하였다. 구단은 가칭 '인천시민프로축구단'으로 불렸으며 초기 창단자금으로 150억 원을 책정하고 2002 한일 월드컵을 치르고 남은 자금 30억원과 기업 자금 유치, 시민주 공모 등을 통해 자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논의는 빠르게 진행되어 K리그 2004 시즌부터 참여하겠다는 발표가 이루어졌으며 9월에 TSV 1860 뮌헨의 감독으로 유명했던 독일의 축구 감독 베르너 로란트를 영입했다.[2] 또한 10월에 시민 공모를 통해 구단의 명칭을 인천 유나이티드 FC로 최종 확정하였다.[3] 선수 영입에도 박차를 가해 안양 LG 치타스에서 최태욱을 영입하고 터키의 국가대표 알파이 외잘란을 영입하는 등 과감한 투자를 했다.[4]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성적은 저조하여 2004년 K리그 첫 시즌에는 전기리그 13위에 그쳤다. 하지만 후기리그에서는 기세를 올려 4위를 기록했다. 2004시즌 전반기가 종료된 8월에 로란트 감독은 부인의 건강 악화로 인한 개인적인 사정으로 사임했으며, 장외룡 수석 코치가 감독대행으로 지휘봉을 잡게 되었다.[5] 시민구단의 역사를 다시 쓴 2005년 인천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크게 기록되는 시즌은 창단 이후 리그에서 2년차를 맞이한 2005년 K리그이다. 팀의 간판 선수로 평가되던 최태욱을 J리그 시미즈 에스펄스로 이적보내며 얻은 자금 15억 원을 구단 운영자금으로 사용하는 등 대기업의 지원을 받는 대규모 구단과는 다르게 가용 자금이 부족했던 인천은 제대로 선수 수급이 안 되어 스쿼드가 얇을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전용 연습구장도 없어 훈련을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해야 할 정도로 팀 사정이 열악한 상황에 처해 있었는데[6]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장 임중용과 신인 방승환, 외국인 공격수 3인방 아기치, 셀미르, 라돈치치 등의 활약을 앞세워 전기리그 7승 3무 2패로 2위, 후기리그 6승 3무 3패로 5위로 통합 성적 13승 6무 5패로 우승을 기록, 리그에 새 바람을 일으키며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또한 플레이오프에서 전기리그 우승 팀 부산 아이파크를 2대 0으로 누르며 K리그 챔피언 결정전에 진출, 통합 우승의 기대를 한껏 높였다. 그러나 인천의 전진은 울산 현대 호랑이에게 통합 스코어 3대 6으로 패하면서 끝났으며, 최종 기록은 리그 준우승으로 되었다. 비록 팀은 '기적같은 행보의 끝', '리그 방식의 희생양'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최종 준우승에 머물렀으나 '시민 구단의 돌풍'이라는 찬사와 함께 인천에 스포트라이트가 집중적으로 비춰졌다. 그 해 1월 3일에 감독 대행에서 감독으로 승격되며[7] 시즌 동안 인천을 이끈 장외룡 감독은 리더십과 전술 운용에 탁월한 능력을 보이며 인천 돌풍의 지휘자로 명성을 얻었고, 그것은 울산의 김정남 감독을 투표에서 1표 차로 제치며 그 해의 K리그 감독상 수상으로 결실을 맺었다.[8] 장 감독의 감독상 수상은 리그 우승 팀이 아닌 감독이 수상을 한 최초의 사례로 기록되기도 했다.[9] 이렇듯 인천이 2005년에 일으킨 돌풍은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2006년 12월 14일에 2005 시즌의 인천 유나이티드를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 비상이 개봉했다.[10] 2006~2008 시즌 지난 시즌에서 정규리그 우승, 통합 준우승을 기록하며 다음 시즌에 대한 기대를 갖게 했던 인천이었으나 2006 시즌에서는 전기리그에서는 2승 8무 3패로 10위, 후기리그에서는 5승 4무 4패로 6위를 기록, 통합 순위 9위에 자리하며 기대와는 다르게 우승권에서 멀어진 성적을 기록했다. 2007 시즌에는 리그가 시작하기 앞서 2007년 1월 25일 선진 축구를 배우고 특히 2군, 유소년 시스템에 대한 연구 및 체득을 위해 K리그 구단 최초로 감독을 1년간 영국에 지도자 연수를 보내는 파격적인 투자를 했다.[11] 장 감독이 연수를 가 있는 동안에는 박이천 기술고문이 감독 대행직을 맡아 수행했다. 한편 인천의 서포터들은 2007년 8월 29일 전북 현대 모터스와의 원정 경기가 열리는 날에 인천광역시 구월동 로데오거리에서 K리그 최초의 길거리 응원을 펼쳤는데,[12] 이는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대중 응원 문화로 자리매김한 거리 응원 문화를 국가대표급 경기가 아닌 일반 클럽 경기에 적용시킨 사례로 기록되었다. 한편 전기리그와 후기리그 구분 없이 치러진 2007 시즌에서 인천은 최종 순위 9위를 기록했다. 2008 시즌에는 팀의 김시석 코치를 스코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셀틱 FC로 유학을 보내, 장외룡 감독에 이어 두 번째 스태프 유학을 보냈다.[13] 리그에서는 시즌 초반 제주 유나이티드, 전남 드래곤즈, 포항 스틸러스를 상대로 3연승을 거두는 등 상승세를 탔었으나 리그 후반에 승리보다는 무승부와 패배를 더 많이 기록, 전북 현대 모터스, 경남 FC와 함께 6강 플레이오프의 마지노선인 6위에 들기 위한 경쟁을 벌였다. 그러나 리그 마지막 라운드에 수원 삼성 블루윙즈에 1대 3으로 패하며 7위를 기록, 경남을 홈에서 3대 1로 꺾은 전북에게 6위 자리를 내주며 플레이오프 진출이 좌절되었다. 4년 만에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다 2006년 9위, 2007년 9위, 2008년 7위를 기록한 인천은 번번이 6강 플레이오프의 문턱에서 좌절하며 2005년의 분위기를 되살리는 데에 실패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2009 시즌에 앞서 인천은 팀의 지주이자 구단 차원에서 크게 투자를 한 장외룡 감독을 J리그의 오미야 아르디자로 떠나보내게 된다. 인천은 장 감독의 부재를 곧바로 일리야 페트코비치 감독을 영입하면서 메웠다.[14] 페트코비치 감독은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축구 국가대표팀을 2006년 FIFA 월드컵 본선에 올려놓은 감독으로써 특히 월드컵 예선에서는 최소 실점으로 본선에 올라 세간의 주목을 받기도 했던 명감독이었다. 또한 신인 드래프트를 통해 고교 시절부터 특급 공격수로 평가받던 홍익대학교의 유병수를 영입했고, 이외에도 팀에서 2004년부터 2008년까지 맹활약하며 인천 서포터들의 큰 지지를 받았던 제난 라돈치치가 성남 일화 천마로 이적하면서 생긴 외국인 스트라이커의 공백을 마케도니아 공화국 축구 국가대표팀 출신의 드라간 차디코프스키로 채웠다. 그리고 K리그 구단 중 최초로 아시아 쿼터제를 사용하여 오스트레일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출신의 수비수 제이드 노스를 영입하는 등 스쿼드를 강화했다. 인천은 시즌 전반기 14경기 6승 5무 3패의 성적을 기록하며 플레이오프 진출 가능성을 밝게 하였으나, 8월 23일 수원 삼성 블루윙즈에 승리를 거둔 이후 6경기 연속 무승의 저조한 성적을 거두며 불안함을 노출하기 시작했다. 용병 공격수 챠디의 부진과 시즌 초 활약한 강수일의 침체, 시즌 중반에 영입한 세르비아 출신 용병 미드필더 오그넨 코로만의 부상 등이 부진의 원인으로 지적되던 가운데 인천은 시즌 마지막 4경기에서 3승 1패를 거두며 막판 승점 쌓기에 성공, 정규리그 순위 5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데에 성공했다. 비록 6강 플레이오프에서 정규리그 4위팀 성남 일화 천마에 접전 끝에 패하여 상위 단계에 진출하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4년 만에 플레이오프 축구에 합류하는 성과를 거두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는 성공했다. 특히 리그 27경기에서 12골 4도움을 기록하며 신인왕 후보로 강력하게 거론되었던 K리그 1년차 신인 유병수의 대활약은 2009 시즌 인천 축구에서의 빼놓을 수 없는 기록이다. 하지만 K리그에서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FA컵에서 경희대학교에 일격을 당하며 32강에서 탈락하고 컵대회에서는 FC 서울에 져 8강에서 탈락하는 등 토너먼트 대회에서는 저조한 성적을 거두었다. 2010 시즌 2010 시즌 초에 전남 드래곤즈와 광주 상무를 꺾고 2연승을 하였으나 이후 성남 일화 천마에게 0대 6 대패를 당한 경기를 포함하여 5연패를 당하였다. 주 득점원이었던 유병수 또한 침묵을 이어갔다. 그러나 4월 18일, 감독 교체 이후에 똑같이 분위기가 좋지 않았던 포항 스틸러스를 상대로 유병수가 네 골을 쏟아부으며 대승을 거두었다. 그 경기 이후로 인천 유나이티드는 무패 가도를 달렸으나 6월 8일 감독 일리야 페트코비치가 아내의 건강 악화의 이유로 돌연 사퇴하고 말았다. 페트코비치의 공백을 수석 코치였던 김봉길이 메꾸었으나 6강 챔피언십 순위까지 올라섰던 인천 유나이티드는 점점 순위권에서 멀어졌다. 페트코비치의 사임 약 세 달 후인 8월 22일 대한민국 국가대표 감독을 지낸 허정무가 지휘봉을 잡았다.[15] 허정무가 맡은 인천은 2010 시즌을 11위로 마감하였고 유병수는 K리그 득점왕을 차지하였다. 허정무 감독 퇴임과 김봉길 감독 대행 체재 2011 시즌 초반 유병수의 부진으로 득점 난조에 시달리며 부진하였으나 6라운드를 기점으로 상승 곡선을 그렸으며, 15라운드가 종료된 후엔 5위까지 랭크되었다. 하지만 끝까지 좋은 모습을 이어가지 못하고 리그를 13위로 마무리 지었고 FA컵에서도 성남에 패하며 16강에서 탈락하였다. 2012 시즌을 앞두고 인천 구단은 파란색 바탕에 빨간색이 사용된 새로운 유니폼 디자인을 발표하였다.[16] 그러자 창단 이후부터 고수해오던 파란색과 검은색의 세로 줄무늬 유니폼을 갑작스럽게 바꾼 것에 대하여 팬들의 반발이 일어났고 바뀐 유니폼에 대해 지지 발언을 한 허정무 감독에 대하여 비판 여론이 일기도 하였다. 한편 새로운 시즌을 위하여 김남일, 설기현, 네이선 번즈, 김태윤, 윤준하 등을 영입하며 대대적으로 전력을 보강하였으나 시즌 초반 부진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며 강등권을 맴돌았다. 이에 대해 허정무 감독에 대한 책임론이 일었고 4월 10일 결국 허정무 감독이 자진 사퇴하였다. 이후 김봉길 수석 코치가 감독 대행으로 후임 감독 자리를 이어받았다. 김봉길 감독 부임 이후 성적이 반등하자 구단은 김봉길 감독 대행을 7월 16일 정식 감독으로 임명하였다. 다시 한 번 비상, 새로운 역사 인천은 김봉길 감독 정식 취임 이후 순위를 끌어올리기 시작하여 25~29라운드 동안 5연승을 기록하며 8위에 안착했지만, 30라운드에 제주와 무승부를 기록하며 경남에 골 득실차가 뒤져 9위로 밀려났다. 그 후 그룹B에서 무패행진을 이어가며 19경기 연속 무패를 기록했지만 44라운드 강원과의 경기에서 2-1로 패하며[17] 연속 무패 기록을 19경기에서 마감하였다. 김도훈의 '늑대 축구' 2015년 1월 13일 인천은 김봉길의 후임으로, 김도훈을 팀의 제 6대 감독으로 선임하였다. 시즌 초반 구단 재정난과 선수 급여 문제 등 여러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본인 특유의 '늑대 축구'를 앞세워 FA컵에서 준우승을 거두고 상위 스플릿 A 진출에 거의 근접하는 등의 성과를 거두어 미래와 전망을 밝게 하였다. 2016 시즌을 앞두고 호앙아인 잘라이로부터 쯔엉을 임대영입하며 K리그팀 최초로 베트남 선수를 영입하였다. 하지만 2016 시즌을 앞두고 구단의 임금체불 문제와 더불어 김인성, 이천수, 유현 등의 주전 선수 유출로 어려움을 겪었고, 이로 인해 인천은 하위권을 전전하였고, 김도훈은 성적부진의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다. '이기는 형' 이기형의 등장 2016년 11월 5일, 잔류가 확정되자 기쁨을 나누기 위해 팬들이 그라운드로 들어오고 있다. 김도훈 감독의 사임 이후 이기형 코치가 감독대행을 맞게 되었다. 이기형 감독대행은 선수들과 소통하며 그동안 많이 출전하지 못했던 쯔엉, 김대경 등에 기회를 주는 등 다양한 선수에게 기회를 주었다. 이기형 감독대행이 팀을 맡은 이후 팀은 8연속 무패(5승 3무)를 달리는 등 10경기에서 6승 3무 1패를 기록하는 뒷심을 발휘했고 최종전인 수원FC전에서 1-0으로 승리하며 시즌 초반 107일 간의 최하위를 딛고 최종 순위 10위로 잔류를 확정하게 되었다. 한편 인천의 잔류를 이끌어낸 이기형 감독대행에게는 ‘이기는 형’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2016년 11월 29일, 이기형은 인천의 정식감독으로 부임하였다. '동화 축구' 욘 안드레센 인천은 심각하게 약화된 수비력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강인덕 대표이사와 이기형 전 감독의 체제에서 1승4무7패를 거두고, 박성철 대행 체제에서도 1무1패를 기록하는 등 매우 나쁜 상황에 처해있었다. 단순히 경기력만 나쁜 것도 아니었다. 팀내 규정을 어긴 선수에게서 벌금도 제대로 못 걷고, 어린 선수가 베테랑 선수를 존중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는 등 팀내 분위기도 안좋았고, 경기 결과가 안좋게 끝날 때 감독이 특정 선수를 탓하는 등 말그대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부임한 북한축구 감독출신 욘 안데르센은 수비진 안정화와 팀 분위기 개선을 모두 이뤄내기 위해 노력했다. 우선 측면 수비 개선을 위해 왕성한 활동량이 장점인 김한빈을 부천에서, 좋은 수비능력을 보유한 정동윤을 광주에서 영입했다. 그리고 그중 정동윤의 영입이 적중하면서 최종환의 기량 저하와 대체자원의 부재로 인해 주된 실점루트가 되던 오른쪽 측면을 안정시키는 데 성공했다. 중앙 수비진은 나이때문인지 기량이 많이 떨어진 이윤표 대신 마음을 다잡고 각성한 부노자, 리그 수위급의 체격과 제공권을 지닌 김대중, 뛰어난 피지컬과 지능적인 수비를 바탕으로 김학범호 1기 주장으로 선임되었던, 하지만 정작 이기형 체제에선 출전기회를 받지 못하던 김정호 등을 기용하면서 안정시켰다. 거기에 넓은 수비범위를 부담스러워하던 고슬기 대신 활동량도 많고 수비력도 좋은 임은수를 수비형 미드필더로 기용하는 등 미드필더진의 수비력도 향상시키면서 쉽게 뚫리지 않는 수비진을 구축해냈다. 무너진 팀의 기강은 과거에 인천에서 활약하던 베테랑 남준재를 자유계약으로 영입한 뒤 주전으로 기용해 효과를 보고, 부노자, 박종진, 고슬기 등 다른 베테랑 선수들도 각성시켜 실전에서 활약하도록 유도하는 방법 등을 통해 바로세웠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곽해성, 강지용 등을 대체자원으로 기용했으나 똑같은 경로로 여러차례 실점하거나 7대0 대패를 당하는 등 실패하기도 하고, 역삼각형이던 중원 조합을 삼각형 모양으로 바꾼 뒤 테크닉이 좋은 공격형 미드필더 이정빈을 3선에 배치해 빌드업의 시발점 역할을 부여했으나 다소 부족한 수비력으로 인해 결국 기용을 중단하는 등 중간중간에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결국 잔류를 위해 이루어야 할 것들을 이루며 팀을 안정시킨 안데르센의 능력은 높이 살 만하다. 결과로는 2018 시즌 10승 12무 16패로 또다시 잔류를 하였다.